시인 의 방

정천한해(情天恨海)

덕전(德田) 2010. 8. 17. 14:29

            

                    

 

정천 한해(情天恨海)/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도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가을 하늘이 높다고 해도 그리움으로 가득찬 마음만 못하고,

깊을 대로 깊어진 봄 바다보다 가슴속에 사무친 한이 더 절실하다.

그리는 정이 두터워지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마는 얄팍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진실하기가 힘들고,

정 때문에 깊어진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지는 않겠지만, 쉽게 잊어버리기란 힘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결국, 시적 화자를 포함한 인간 모두의 유한성을 지적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랑이 진정 이루어진다면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정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원한을 극복하여 오히려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한은 깊을수록 신비로운 것이리라,

그리워하고 원망하는 대상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정한이 없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리리라.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대상이나 마음이 없다면 존재 가치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 제기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정이 세상 어느 것보다 고귀하고 소중한 것인 줄 알았는데,

님의 초월적이고 드높은 세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구나.

그리워하다 사무쳐 버린 한의 세계가 가장 깊고 절실한 줄 알았는데,

님의 심오하고 은근한 세계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대상에 대한 사모의 정과

그 과정에서 생긴 원한을 모두 지워 버리고 더 나은 세상으로 승화시켜야 하기에 

님에게로의 귀의는 필연적 귀결이라 할수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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