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모음방

상춘곡(賞春曲)/정극인

덕전(德田) 2018. 3. 21. 15:08



    상춘곡 (賞春曲)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生涯)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山林)에 묻혀 있어 지락(至樂)을 모를 것인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앞에 두고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에 풍월주인(風月主人) 되었어라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細雨) 중에 푸르도다 칼로 마름질했는가 붓으로 그려 냈는가 조화신공(造化神功)이 물물(物物)마다 야단스럽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어니 흥(興)인들 다를소냐 시비(柴扉)에 걸어 보고 정자(亭子)에 앉아 보니 소요음영(逍遙吟詠)하여 산일(山日)이 적적(寂寂)한데 한중진미(閒中眞味)를 알 이 없이 혼자로다 이봐 이웃들아 산수(山水) 구경 가자꾸나 답청(踏靑)은 오늘 하고 욕기(浴沂)는 내일(來日) 하세. 아침에 채산(菜山)하고 저녁에 조수(釣水)하세 갓 괴어 익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받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를 세며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불어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에 진다 준중(樽中)이 비었거든 나에게 아뢰어라. 소동(小童) 아이에게 주가(酒家)에 술을 물어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明沙) 맑은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보니 떠 오는 것이 도화(桃花)로다 무릉(武陵)이 가깝도다 저 들이 그것인가 송간세로(松間細路)에 두견화(杜鵑花)를 잡아 들고 봉두(峯頭)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천촌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벌여 있네 연하일휘(煙霞日輝)는 금수(錦繡)를 펴 놓은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빛도 유여(有餘)할사 공명(功名)도 날 꺼리고 부귀(富貴)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에 어떤 벗이 있을까



    [현대어풀이]

    속세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옛 사람의 운치 있는 생활을 따를까 못 따를까?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나만한 사람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자연과 벗하여 사는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일까?
    두어 간 초가집을 맑은 시냇물 앞에 지어 놓고
    송죽(松竹)이 우거진 숲 속에 자연의 주인이 되었도다.
    엊그제 겨울이 가고, 이제 봄이 돌아오니, 복숭아꽃, 살구꽃은
    저녁 놀 속에 피어 있고, 버드나무와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마름질해 냈는가, 붓으로 그려냈는가?
    조물주의 신비로운 창조의 솜씨가 사물마다에 야단스레 나타나 있구나.
    수풀에서 우는 새는 봄의 흥겨움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마다 아양부리는 모습이로구나.
    자연과 내가 하나이니 흥(興)이야 다르겠는가?
    사립문을 나와 걸어도 보고, 정자에 앉아 보기도 하고,
    또 천천히 거닐며 시를 읊기도 하며 산 속에서 지내는 나날이
    고요하고 적적(寂寂)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가로운 가운데
    참된 즐거움을 누리는 맛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나 혼자 뿐이로구나!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을 가자꾸나.

    푸른 풀을 밟으며 들을 산책하는 일은 오늘 하고,
    냇물에서 목욕하는 일은 내일 하세.
    아침에는 산나물을 캐고 저녁에는 낚시질을 하세.
    이제 막 익어서 발효한 술을 갈건(葛巾)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를 꺾어 그것으로 잔 수를 세어 가며 먹으리라.
    부드러운 봄바람이 잠깐 불어 푸른 물이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술잔에 스며들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
    술동이가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아이를 시켜 술집에 술이 있는가를 물어 받아다,
    어른은 지팡이를 짚고, 아이는 술동이를 메고,

    나직이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 시냇가에 혼자 앉아,
    깨끗한 모래사장 맑은 물에 술잔을 씻어 술을 가득 부어 들고,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다.
    무릉도원이 가깝도다. 저 들이 바로 그 선경인가?
    소나무 숲 사이 좁은 길에 진달래꽃을 부여잡고,
    산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내려다보니,
    수많은 촌락이 여기저기에 벌여 있네.
    안개와 놀과 빛나는 햇살로 채색된 자연의 아름다움은
    마치 수놓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구나.
    엊그제까지 검던 들이 봄빛으로 넘치는구나.
    공명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
    아름다운 자연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소박하고 청진한 시골 생활에 부귀와 공명 같은
    번거로운 생각을 아니 하네.
    아무튼 한평생 자연을 벗하여 욕심 내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족하지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해제(解題) 

이 작품은 조선 전기에 정극인선생이 쓴 가사이다.

정극인은 단종이 죽자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인

태인에 내려가 살았는데, 이 작품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이 작품에는 자연 속에서 봄을 맞이하는 자연 친화적 삶과

소박한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는 안빈낙도의 삶이 잘 드러나 있다.

상춘곡을 가사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형식이 잘 정제되어 있고 사용된 어휘가 15세기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이 작품을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주제는 봄 경치를 즐기는 흥취와 유유자적 함으로​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