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 작 독락당 현판
독랑당 내 정자 계정
무위(無爲) / 이언적 李彦迪
萬物變遷無定態 (만물변천 무정태)
一身閑寂自隨時 (일신한적 자수시)
年來漸省經營力 (연래점성 경영력)
長對靑山不賦詩 (장대청산 불부시)
해의 (解義)
만물은 변천하여 일정한 자태없이
이 한 몸 한가로와 절로 때를 따르노라.
연래로 경영하는 힘을 점차 줄인지라
푸른 산 오래 보면서 시도 짓지 못하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이 시는 도학자(道學者)인 이언적 선생의 학자적인 면모를 잘 드러낸 시이다.
선생이 사간(司諫) 직책에 있을 때 당시의 권신인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당해
고향으로 내려와 경주 자옥산 아래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 시는 이 시기에 지은 시로 도가의 무위 사상을 말한 것이 아니고,
유가(儒家)의 사리(事理)를 거슬러 억지로 이루려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독락당 현판은 아계 이산해가 휘호하였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정해진 형태가 없이 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선생 역시 자신의 몸도 변화 속에 있는 것이므로 한적하게 지내며 때의 변천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근래 들어 점점 경영하는 힘, 즉 출세나 명예를 탐하는 것, 문장을 꾸미는 것 등등을
의미하는 작위(作爲)의 힘이 줄어드니 오래 청산을 마주하고도 속인처럼 시를 짓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수광은 이 시를‘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말의 뜻이 심히 높아[語意甚高],
구구하게 시를 짓는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非苟苟作詩者所能及也]”라고 평했다.
이언적(李彦迪, 1491, 성종 22~1553, 명종 8)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부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인동현감·
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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