益齋 李齊賢 /
익재 이제현(1287~1367)은 고려 말의 정치가요, 학자요, 대시인이며 문장가이다. 그는 경주 사람으로 호는 益齋․櫟翁이라 하였다. 이제현은 ‘朝鮮三千年의 大家’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역대의 수많은 시화집에 거론되었으며 『동문선』에 최다수의 작품이 실린 것으로도 얼마나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았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신흥관료 출신인 아버지 이진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학문에 밝았으며, 성리학을 고려에 처음 들여온 백이정의 문인이 되어 정주학을 배웠고, 장인이 된 권보에게서 학문을 익혀 이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낸 대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여 평생 일곱 임금을 섬기면서 다섯 번이나 재상을 지낸 대단한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가 시류에 영합하여 처세에 능하였던 인물은 아니다. 『고려사』나 기타의 사료를 통해 드러난 익재는 객관적이면서 대의명분과 자주성을 잃지 않았던 현실적이면서도 절도 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화집에는 이제현과 충선왕에 관한 일화가 몇 편 소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만권당을 열자 학자 염복(閻復), 요수(姚燧), 조자앙(趙子昻)이 모여들었다. 어느 날 임금이 ‘닭소리가 문 앞에 늘어진 버들과 같다’라는 시를 지었다. 그러자 여러 학사들이 用事의 출처를 물었다. 왕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익재가 ‘한유의 <거문고>란 시에 ‘뜬구름 버들개지는 뿌리도 꼭지도 없다’라고 하였으니 옛사람도 소리를 버들가지에 비유한 예가 있다.’고 해명하였다. 자리에 있던 학사들이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익재가 없었다면 충선왕의 시는 폄자들의 위세에 눌려 몹시 괴로움을 당했을 것이다.
이제 시인으로서의 이제현의 작품을 감상하여 보자.
종이 이불 썰렁하고 불등 침침한데 紙皮生寒佛燈暗
어린 중 밤새도록 종을 치지 않네 沙彌一夜不鳴鍾
자는 손 일찍 문 연다 꾸짖겠지만 應嗔宿客開門早
암자 앞 눈 쌓인 소나무 보려고 나왔네 要看庵前雪壓松
위의 <山中雪夜>는 익제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칠언절구이다. 시인은 눈오는 밤 어느 산사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절집이라 잠자리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을 터. 종잇장 같이 얇은 이불에선 한기가 스며들고 등마저 가물가물하다.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 탓인지 시인은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시각을 알리는 사미승의 타종이 밤새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는 승구는 시인이 밤새 뒤척였다는 표현이리라. 시인은 고요한 산사의 적막함을 견디다 못해 절주인이 깨어 무어라 꾸짖겠지만 문을 열고 나와 본다. 밤사이 내린 눈으로 산사 주변이 온통 새하얗게 되었을 터. 시인의 눈에는 무엇보다 눈으로 무겁게 내리눌린 암자 앞 소나무가 포착된다. 눈과 소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새벽 산사의 풍경은 단순한 言表를 넘어선 ‘言外意’의 의미를 띠고 있다. 이것은 청정하고 깊은 시인의 정신적 수준을 드러냄과 동시에 지향점으로 해석된다.
익재는 ‘언외의’에 대하여 ‘옛 사람의 시는 눈앞의 풍경을 묘사하였으나 의미는 말밖에 있어서 말은 끝났으나 맛은 끝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시적 맛은 비유하자면 마치 한밤에 호젓이 앉았을 때라야 느낄 수 있는 화분에 심은 난초의 향기라 하였다. 이 ‘언외의’는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다른 말로 한다면 ‘함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일찍이 이 시를 두고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山家 雪夜의 기이한 풍취를 그려냈는데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어금니와 뺨 사이에 찬이슬 기운이 생기게 한다’고 하였으며, 최해는 ‘익재의 반평생 시법이 여기에 다 나타났다’고 평하였다.
이제현의 시에 ‘목구멍에는 연기가 피고 땀은 물 흐르는 듯/ 열 걸음 걷자면 여덟 아홉 번 쉬게 되네/ 뒤에서 오는 자 앞지름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라/ 천천히 가도 결국은 산꼭대기에 이르리라’가 있다. 시제는 <곡령에 오르며(登鵠嶺)>이다. 『동인시화』에는 ‘천천히 가도 결국은 산꼭대기에 이르리라’라는 구절을 논자들은 조용하고 한없이 너그러우며 원대한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과연 나이 여든이 넘어서 다섯 임금을 섬기는 재상이 되어 공명과 부귀를 시종 아울러 지녔다. 시란 것은 마음에서 피어나고 기에서 고이는 것이니, 옛사람이 말한 ‘그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로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위에서 소개한 시화 역시 함축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니 이것이 곧 언외의인 것이다.
다음의 시는 <마하연(摩訶衍)>이다.
산중의 해는 정오인데도 山中日亭午
이슬에 미투리가 흠뻑 젖었네 草露渥芒屨
옛절이라 스님네 살지를 않고 古寺無居僧
흰 구름만 뜨락에 가득하구나 白雲滿庭戶
위의 시는 금강산 마하연을 읊은 기행시다. 날은 정오인데 깊은 산속이라 덜 마른 이슬에 짚신이 흠뻑 젖었고, 마하연에는 거처하는 스님도 없이 다만 흰 구름만 뜰에 가득하다고 하였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처리한 시는 마하연의 정적과 고요함을 한층 더하고 있다.
이제현은 대체로 정주학과 관련하여 전형적인 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이처럼 불사를 제재로 한 시가 많이 있다. 혹자는 이제현의 학문을 두고 정주성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불교, 도교 등에 대하여 포괄적 會通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제현은 실제 불교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현과 후처 박씨부인 사이의 딸 하나가 공민왕의 후궁이 된 惠妃인데 훗날 여승이 되었고, 그의 손자 내유(乃猷)는 廣度寺의 주지가 되었다. 또 妻祖父 권단(權㫜)은 당대 문인의 거두였는데 불교를 혹신하였으며, 그의 처남되는 權宗頂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러한 집안의 내력으로 자연스럽게 불법에 접할 수 있게 된 듯하다.
다음은 고려가요를 단구인 칠언절구의 소악부로 한역해 놓은 시모음집인 『익재소악부』에 실린 <濟危寶>란 작품을 감상하기로 하자.
완사 냇가 수양버들 드리운 곁에 浣沙溪上傍垂楊
손을 잡고 마음 주는 백마 탄 임 執手論心白馬郞
추녀를 연하는 봄비가 쏟아진들 縱有連簷三月雨
어찌 차마 손끝의 내음 씻으랴 指頭何忍洗餘香
이 노래의 우리말 가사는 전하지 않고 다만 한역시만 남아 있다. 이 시는 헤어지는 남녀의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수양버들 늘어진 곳에서 손을 맞잡고 서로의 마음을 전하니 삼월 봄비가 온다 한들 지금 이 손끝에 느껴지는 그대의 감촉을 어찌 차마 씻어낼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잊지 못할 것이라는 자기 고백이다. 대단한 정치가요, 학자의 이면에 넘쳐나는 시인의 기질을 십분 확인할 수 있는 시편들이다.
先生의 자취
-1301년(충렬왕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이어 (文科)에 급제, -1310년(충선왕2년) 선부산랑(選部散郞),다음해 전교시승(典校侍丞) 삼사판관(三司判官)등을 역임, -1312년 서해도 안렴사(西海道安廉使)로 나갔다가 성균 악정(成均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1319년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고, 이해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빠이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부당함을 그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 권단정동성사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익제난고에 수록된 詩 한수
선생의 초상
![]() 강산산여담소미 인가처처근화난(江上山如淡掃眉 人家處處槿花難)
정주욕문송간사 책장선규죽하지(停舟欲問松間寺 策杖先窺竹下池)
범영모연방초원 종성효출백운지(帆影暮連芳草遠 鐘聲曉出白雲遲)
빙란일망삼오소 상상장군입마시(憑欄一望三吳小 像想將軍立馬時)
강위에 솟은 산은 미인의 눈썹 같은데 / 이 마을 저 마을 집집마다 무궁화 꽃 울타리
배 멈추고 송림 속의 절을 찾는데 / 대숲 밑에 연못이 눈에 뜨이네
해질녁엔 돛단배들 줄이어 돌아오고 / 동틀 무렵 은은한 종소리 흘러가는 흰구름
정자에 앉아 멀리 삼오(三吳)지방을 바라보면 /장군이 거기 주둔하던 일 새삼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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