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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시조 (꽃, 달, 미인)

덕전(德田) 2022. 4. 24. 19:46

 

 

 

명품시조  (꽃, 달, 미인)


어느날 안민영이 평양 모란봉에 올라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기생 혜란과 소홍이 꽃을 밟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낙화방초로(洛花芳草路)의 깁 치마를 끄럿시니
풍전(風前)에 나난 꼿치 옥협(玉頰)에 부듯친다
앗갑다 쓸어올지연정 밥든 마라 하노라



꽃잎이 떨어지는 싱그러운 풀, 무성한 길가. 비단치마 쓸리듯 오니
바람에 흩날리는 꽃이 예쁜 뺨에 부딪치는구나.
아깝다. 쓸어서 낙화를 담아 올지언정 밟지는 말아다오.

안민영은 혜란에게 일찍 눈도장을 찍어 놓았다.
멀리 꽃 사이로 오고 있는 두 사람 혜란과 소홍. 명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꽃을 노래했으니 어찌 달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으리오.

옛사람이 말했다. 만약 꽃과 달, 미인이 없다면 이 세계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뭐니뭐니 해도 사랑만큼 위대하고 신비로운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 싶다.



아득한 구름 가에 슘어 발근 달 아니면
희미헌 안개 속에 반만 녈닌 꼿치로다
지금에 화용월태는 너를 본가 하노라



아득한 구름 끝에 숨어 있어 밝은 달이 아니면 어찌 볼 수 있겠느냐.
희미한 안개 속에 반쯤 피어 있는 꽃이로구나. 지금에 꽃 같은 얼굴,
달 같은 모습, 너를 보았는가 하노라. 화용월태이다. 그것도 숨어있는 달이요,
반쯤 피어있는 꽃이다. 이쯤이면 미인의 얼굴도 반쯤 가려져있어야 한다.

세상도 세월처럼 흐르는 법이다. 안민영은 오래 머물 수 없는 몸이다.
그녀 곁을 떠나야한다. 이럴 것이면 왜 사랑을 하는지 그래도 사람들은 죽도록 사랑을 한다.



님 이별 하올 져귀 져는 나귀 한치 마소
가노라 돌쳐 셜제 저난 거름 안이런덜
꼿 아래 눈물 젹신 얼골을 엇지 자세이 보리요



님과 이별할 때 다리 저는 나귀를 원망치 마라. 가겠다고 돌아설 때 쩔뚝이는
걸음이 아니었던들 꽃 아래 눈물 짓는 얼굴을 어찌 자세히 볼 수 있었겠는가.
묘한 사랑의 여운이 향기처럼 남는다. 님이 가는 산모롱 길가에 초생달 하나 떴으리라.

지금에 와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은 여전히 신비로운 존재이다.보름달이건 초생달이건
그믐달이건 어떤 달이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달은 아름다운 꽃이요 미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움 문턱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 김강호의 「초생달」


그리움 문턱쯤에서 고개를 내밀고 뒤척이는 시인을 보고 흠짓 놀라 돌아선다.
초생달은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이 남았다. 수줍은 여인의 사랑이 이런 것이었을까.
초생달은 홀연 서쪽 하늘로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믐달처럼 말이다.
분명 어느 늦시월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도 있다.


님께서 달이 뜨면 오신다더니
달이 떠도 님께서는 아니 오시네
생각해보니 님 계신 그곳은
산이 높아 달도 늦게 뜨는가 봐


능운의 시「님 기다리며」이다. 화류장화라한들 이런 기다리는 여심이 없겠는가.
임 계신 그 곳은 산이 높아 달이 늦게 떠서 못 오신다고 하며 자신을 애써 위로하고
있는 것이 애처롭고 짠하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있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운 미인을 일컫는 말이다. 은나라 주왕은 달기라는
미인 때문에 나라를 잃었고 항우와 마지막을 함께한 우미인은 어떤가.
서시는 오나라를 멸망에 빠드리지 않았는가. 양귀비는 또 어떠했는가.

인간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랑이라지만 그나저나 미인과 사랑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래도 사랑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세상 어디에 없을 듯싶다.
우리에겐 하늘이 있고 산이 있고 강이 있다.
그리고 하늘과 산과 강을 바라볼 수 있는 또한 창이 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흰구름도 흘러가지 않고, 산새도 울지 않고,
강물도 출렁거리지도 않을 것이다.

눈물 다 쏟아낸 사랑은 누구에게나 다 갖고 있지 않을까.
달은 꽃피는 봄도 좋지만 스산한 늦가을이 더 어울릴 듯 싶다.
여기에 대금 한 자락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만추의 스산함을 달래줄 수 있는 것, 시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가을은 산수도 시요, 달도 꽃도 시요 술도 여인도 시다.
어딜가도 가을은 시가 아닌 것이 없다. 인생 육칠십도 인생의 시이다.
영원히 신비로운 것은 사랑 말고 무엇이 또 있을까. 

 

안민영:

조선 후기의 가객. 1876년 스승인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시가집 〈가곡원류 歌曲源流〉를 편찬하여 시조문학을 정리했다.

 

서예세상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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